내가 고른 카베르네 소비뇽 왜 맛이 없을까? | 한 달간 카베르네 소비뇽 100병 마시기

이 글은 2021년 9월 루바토 블로그에 쓴 “비운의 황제 카베르네 쇼비뇽 〈솔직한 와인 이야기〉”를 현 시점에서 보완한 글로, 대다수의 소비자가 카베르네 소비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현장에서 직접 보고 느낀 경험에 대한 주관적인 이야기입니다. 또한 와인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누군가 카베르네 소비뇽을 추천해 달라고 한다면 건넬 유용한 팁을 담았습니다.

레드 와인은 무조건 ‘카베르네 소비뇽!’이라고요?

레드 와인을 이야기할 때 카베르네 소비뇽 Cabernet Sauvignon 품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국내에서는 카베르네 소비뇽이 ‘수많은 레드 와인 품종 중 하나’가 아니라 그냥 ‘레드 와인 = 카베르네 소비뇽’이라는 인식이 압도적일 만큼,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루바토를 방문한 손님에게 와인을 추천하려고 평소 취향이나 좋아하는 스타일을 물어보면, ‘카베르네 소비뇽을 좋아한다’는 답변이 언제나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손님이 오늘 마실 와인으로 ‘레드 와인’을 떠올렸다면 십중팔구 카베르네 소비뇽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경우입니다. 심지어 와인 이름을 콕 집어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디아블로 Casillero del Diablo나 몬테스 알파 Montes Alpha, 1865 Viña San Pedro, 오퍼스 원 Opus One 같은 와인들 말입니다.

하루는 이런 와인들 중 몇 개를 매장 앞 편의점에 가 직접 사 와서 며칠에 걸쳐 테이스팅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스타일의 와인인지 충분히 짐작 가는 와인을 굳이 맛만 보기 위해, 테이스팅해야 할 신규 입고 와인을 매장에 쌓아둔 채, 편의점에서 직접 와인을 사 와서 테이스팅했다는 것이죠.

이 경험은 이후 제가 매장을 중심으로 유통되는 와인뿐 아니라 대형 마트와 편의점에서 많이 팔리는 ‘대중적인’ 와인에도 꾸준히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기회가 있으면 동네 마트에서 와인을 계속 사서 마셔보며 ‘요즘 어떤 와인이 유행이지?’, 그리고 나아가 대형 수입사/유통사가 ‘어떤 와인을 소비자들에게 노출시키고 있지?’ 하는 관심으로 이어졌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때 산 와인은 테이스팅 도중 반 병도 채 비우지 못했습니다. 며칠 두면 와인이 부드러워지는 경우도 있어서 테이스팅을 2~3일에 걸쳐 했습니다만 결국 대부분 버렸습니다.

왜? 너무 쓰고 맛없어서…

품종 이해하기카베르네 소비뇽 Cabernet Sauvignon

카베르네 소비뇽 Cabernet Sauvignon을 국내 애호가들 사이에선 줄여서 ‘까쇼(카쇼)’라고 부릅니다. 미국에선 Cabernet Sauvignon의 앞 글자를 따서 ‘캡(CAB)’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프랑스 보르도 Bordeaux가 원산지이지만, 기후와 토양을 가리지 않고 어디서든 잘 자라기에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품종입니다.

포도알이 블루베리처럼 작아서 다른 포도에 비교하면 껍질과 씨의 비중이 높습니다. 레드 와인의 텁텁하고 떫은맛, 즉 ‘탄닌 Tannin’은 바로 이 껍질과 씨에서 나오기에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이제 막 만든 와인은 대체로 탄닌이 높고 거친 편입니다.

카베르네 소비뇽 포도는 두꺼운 껍질과 높은 산도 덕분에 병충해에 강하고, 그래서 앞서 말한 ‘기후와 토질을 가리지 않고 어디서든 잘 자라기에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포도’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병충해에 강하고 잘 자란다는 것 말고도 이 품종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특징이 하나 더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탄닌 Tannin‘입니다.

카베르네 소비뇽의 풍부한 탄닌은 장기 숙성과 보관에 큰 장점입니다. 짧게는 7~8년, 길게는 수십 년 후에 진가를 발휘한다고 알려진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향과 맛은 훌륭하지만 오래 숙성시키기 어려운 품종의 경우, 카베르네 소비뇽과 섞어(블렌딩) 장기 숙성이 가능한 와인을 만듭니다.

예를 들면 까쇼를 주품종으로 하고 여기에 부드럽고 향이 좋은 메를로 Merlot를 섞거나 카베르네 프랑 Cabernet Franc, 말벡 Malbec 등을 더하는 식입니다. 프랑스 보르도Bordeaux에서 만드는 보르도 스타일의 와인들은 대부분 이런 블렌딩 와인입니다.

내가 고른 카베르네 소비뇽이 맛없는 이유


자, 이제부터가 본론입니다. 솔직히 이야기해 볼까요? 카베르네 소비뇽 100% 와인을 마시고 ‘맛있다’고 느낀 경우가 얼마나 있었나요?

이 질문은 논란의 여지가 많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은 특정 와인이나 품종을 일방적으로 폄하하려는 게 아니니 끝까지 읽고 판단해 주세요.

날씨와 토양에 잘 적응하고 병충해에 강해 모든 대륙에 걸쳐 가장 많이 재배되며, 최고급 블렌딩 와인에도 두루 쓰이기에 카베르네 소비뇽은 가히 “레드 와인의 황제”라 부르기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 품종으로 만든 와인은 5천 원 남짓한 초저가 와인부터 아주 고가의 와인까지, 가격과 생산지, 어떤 품종을 블렌딩했는지에 따라 선택의 폭이 극단적으로 넓고 맛과 품질도 크게 다릅니다.


현장에서 손님들에게 ‘한 번이라도 들어봤거나 마셔본’ 와인을 물으면 대부분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만든 와인을 꼽습니다. 그렇지만 ‘이게 레드 와인의 황제라고? 왜 이렇게 쓰고 텁텁해?’라고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름만 들으면 다 알 만한, 편의점이나 대형 마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초저가 카베르네 소비뇽은 방금 살펴본 ‘사전적’ 정의와 대부분 다릅니다. 알코올 향이 너무 강하고 쓰고 텁텁한, 극악한 품질의 카베르네 소비뇽을 단지 ‘세일중’이라는 이유 때문에 처음 마신다면… 앞으로 영영 와인 마시는 것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토록 강렬하게 아픈(?) 경험 때문에 레드 와인은 쳐다도 안 보고 화이트 와인만 찾는 분도 꽤 많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누군가는 반대로 이게 딱 완벽한 ‘술’ 같아서 — 강한 알코올 향과 텁텁함이 좋아서 — 카베르네 소비뇽을 선호하는 경우도 상당수 있다는 겁니다.

한 달간 카베르네 소비뇽 100병을 마신 결론

이 글을 위해, 매장을 뛰쳐나와 편의점에 와인을 사러 간 그때를 기점으로 약 한 달간, 어림잡아 100종이 넘는 카베르네 소비뇽을 테이스팅했습니다.

여러 수입사로부터 카베르네 소비뇽을 주품종으로 만든 와인들을 모조리 발주해서 모으고, 대형 마트에서 불티나게 팔린다는 유명한 와인, 편의점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와인까지, 만 원이 조금 넘는 것부터 5만 원대, 10~20만 원 이상까지. 프랑스 보르도, 이탈리아, 독일 와인과 미국, 남아공, 칠레, 호주 와인 등 국가와 대륙, 가격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경우를 ‘블라인드’로, 다양한 상황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마셨습니다.


결론은,

앞서 말했듯 와인의 맛과 품질이 워낙 극단적으로 달라서, ‘이게 바로 카베르네 소비뇽이지!’라고 한마디로 단정 짓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는 겁니다.

이 밭과 울타리 너머 밭에서 난 포도로 만든 와인 맛이 다르고, 같은 와이너리에서 만들어도 생산 연도, 포도알마다 등급을 나눠 품질에 차등을 둡니다. 여기에 서로 다른 양조 방식과 숙성 기간 같은 변수까지 더해지면… ‘카베르네 소비뇽 = ○○○ 와인’이라고 단정하려는 시도 자체가, 내 세계관이 얼마나 좁았는지를 드러내는 부끄러운 착각이었음을 깨닫을 수 밖에 없습니다.

카베르네 소비뇽이 얼마나 다양한지

기억나는 경우만 예를 들자면,

물론 이건 큰 틀의 인상일 뿐, 무조건 일반화하려는 건 아닙니다. 미국 > 나파밸리 Napa Valley 안에서도 밸리 바닥 지역의 풍만하고 ‘끈적한’ 스타일과, 산악 지역의 탄탄하고 절제된 스타일은 완전히 다릅니다. 인접한 소노마 카운티 Sonoma County나 오리건 Oregon, 워싱턴주 Washington State 와인은 또 완전 별개의 세상이죠.

분명 같은 미국 와인임에도 스타일이 이렇게 다른데, 여전히 국내 와인시장은 ‘미국 ㅇㅇㅇ 스타일 나파밸리 카베르네 소비뇽’이라는 타이틀로 미국 와인을 모두 뭉뚱그려 통칭하는 경우가 많고 일반 소비자들 또한 이렇게 인식하는 현실이 아쉽습니다.

미국 뿐 아니라 프랑스 까쇼 역시 메독 Médoc을 포함한 보르도 좌안 Left Bank과 우안 Right Bank 스타일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카베르네 소비뇽 성공 확률 높이는 꿀팁

맛있는 카베르네 소비뇽을 고르는 방법을 공유합니다

‘맛있는 카베르네 소비뇽을 고르는 방법’이라고 쓰고, ‘실패할 확률을 줄이는 법’이라고 읽습니다. ‘맛있다’는 평가는 대단히 주관적입니다. 하지만 ‘최악이다’, ‘피해야 한다’는 평가는 사람마다 공감할 여지가 많습니다.

프랑스 와인을 시도한다면 카베르네 소비뇽 단일 품종 와인 보다 까쇼가 섞인 블렌딩 와인이 실패 확률이 낮습니다. 이때 까쇼 비율이 낮을수록 실패 확률도 줄어듭니다. ‘메독 Médoc’이라 적힌 와인보다 ‘생테밀리옹 Saint-Émilion’이라 적힌 와인이 더 마시기 편합니다.

특히 시중에 유통되는 프랑스 와인은 가격과 품질이 정비례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10만 원짜리 한 병보다 5만 원짜리 한 병 + 2만 원, 3만 원짜리를 한 병씩 사는 게, 그중 내게 맞는 와인을 찾을 확률을 높이는 방법입니다.

미국 와인은 마트 기준 최소 5만 원 이상부터 구입하시는 걸 권합니다. 그 아래로는 2만 원이든 3만 원이든 큰 차이가 없습니다. 확실한 건 미국 와인은 대개 어느 정도 이상 가격 부터는 가격에 비례하여 균형감과 복합미가 좋아진다는 점입니다. 10만 원 넘는 미국 와인은 맛없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죠.

오늘 저녁 곁들일 2~3만 원대 데일리 와인을 찾는다면 호주나 남아공 같은 신대륙 와인을 시도해 보시길 추천합니다. 최소한 같은 가격대 프랑스 와인보다는 훨씬 마시기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거의 모든 경우 초저가 와인은 피하는 게 좋습니다. 요리하면서 열로 다 날려버릴 게 아니라 적어도 ‘맛’을 보며 입에 넣을 거라면 말이죠. 가격과 맛이 늘 정비례하진 않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가치 Value를 위해선 최소한 치러야 할 값 Price이 있습니다.

선물하기 좋은 카베르네 소비뇽

나에게 10만 원이 있고 선물하기 위한 카베르네 소비뇽을 고른다면 :

프랑스 보르도 와인에서 특정 와인을 내가 이미 자주 마셨고 잘 알고 있다면 그걸 사세요. 하지만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로 구입해야 한다면,

10만 원대 미국 와인을 추천합니다. 실패 없고 모양도 좋습니다. 그 가격대 그 정도 와인이면 웬만큼 인지도도 있습니다.

다만 오늘은 ‘반드시’ 기가 막히게 맛있는 와인을 마셔야 한다면 10만 원대 호주 와인을 시도해 보는 걸 추천합니다. ‘이게 카베르네 소비뇽의 완성형이구나!’ 하고 감탄할 수 있습니다.

집 근처 단골 바틀샵이나 대형 마트의 와인 담당 매니저에게 최소 2~3만 원대부터 추천받는다면, 완전히 무작위로 고르는 것보다 맛있게 즐길 확률이 훨씬 높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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