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지냈는지 궁금하셨죠. 그간 밀린 이야기를 전하려고 합니다. 사실 이 글은 이전부터 쓰고 싶었는데, 입안에서만 맴돌고 좀처럼 써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1년이 흘렀네요. 스크롤 압박이 있을 수 있으니 시간 여유가 있을 때 읽으시는 게 좋습니다. 아니면 그냥 잘 지내고 있구나, 정도만 알아주셔도 좋고요.

작년 이맘때도 똑같은 날씨였습니다. 그날도 너무 습해서 잠깐만 밖에 나가도 온몸이 땀에 젖었어요.
7월의 끝자락, 루바토의 마지막 밤을 챙겨 주시기 위해 모인 분들과 함께 와인을 마셨습니다. 사실 무슨 와인을 마셨는지 (다행히 기록은 있지만) 기억은 나지 않아요. 그저 편안히 기대어 앉아 깔깔거리며 웃고 떠들었습니다.
그렇게 반가움과 아쉬움, 홀가분함과 서글픔 등이 어우러진,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들을 함께 공유하며 비워냈습니다.
사실 이날만 그랬던 건 아니에요. 루바토가 영업을 종료한다는 소식을 전한 이후, 7월 한 달은 지면으로 모두 언급하기도 어려울 만큼 정~말 많은 분들이 찾아 주셨습니다. 전해주신 따뜻한 격려와 위로의 마음들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마지막 날이긴 했지만 이날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자리를 조금 일찍 마감했습니다. 이제 진짜 ‘정리’하는 일들이 남았거든요.
며칠 전부터 의자와 테이블 등 큼지막한 기물들은 당근에 올려 두었는데요, 다행이도 빠르게 다음 주인들이 나타났고 마지막 날 저녁 영업을 마무리함과 동시에 모두 판매 했습니다.
의자와 테이블이 매장 밖으로 줄줄이 나갈 때의 감정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조립하다가 손을 다쳤던 기억, 앉을 자리가 모자라 추가로 구매한 의자들, 이 테이블 위에 어떤 메뉴를 올리고 무슨 사진을 찍었는지 등 정말 하나하나가 스쳐 지나가더라고요.


이후부턴 끝없는 짐 정리였습니다.
당장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철거 공사를 시작할 예정이기에 모든 기물과 집기류를 그전에 정리해야 했습니다. 이날 밤 4시간, 그리고 쪽잠을 자고 일어난 뒤 철거를 시작하기 전 새벽 2시간이 저에게 주어진 시간 전부였습니다.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를 무한으로 재생시켜 놓고 허리가 끊어져라 박스 정리를 하고 운전해서 나르고,,, 끊없는 반복.
이날 밤부터 다음 날까지 이틀 동안은 너무 더워서 옷도 제대로 못 입고 돌아다녔습니다. 아마 망원동에서 낮 시간에 저를 마주치셨다면 못 알아보셨을 겁니다. 땀에 젖어 넝마가 된 옷과 선글라스를 걸친채 운전하고 짐을 나르고, 공사하시는 분들과 목청을 높이며 며칠을 보냈습니다.
아직도 온 몸이 땀에 젖는 무더운 날이면 이날 새벽 공기가 생각납니다.



짐을 옮기고, 철거를 하고, 복구 공사를 하고, 임대인을 만나고, 보증금을 받고. 이게 끝은 아니었습니다.
폐업 신고와 대출 정리를 위한 은행 업무들, 집안 가득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쌓여 있는 매장에서 가지고 온 짐 정리는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반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 시간을 거치며 ‘폐업, 하고 싶어도 못한다’ ‘폐업도 용기가 필요하다’와 같은 말이 무슨 뜻인지 정말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사업 정리, 폐업 지원 관련해서 알려진 것과 다른 실상이 많고 – 의도적으로 왜곡했다기보단 미처 알려지지 않고 ‘감수해야 하는 현실’이겠지요 – 발품을 팔고 시간이 흘러야 알게 되는 일련의 과정들이 있더군요.


루바토 정리와 거의 동시에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소믈리에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F&B 산업 정점에 선 곳에서 시스템과 하이엔드 고객 경험, 그리고 와인 분야를 더 넓고 깊게 보기 위한 도전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곳에서 일하고 계신 수셰프 Sous-chef 님이 이전에 루바토를 방문했었고 메뉴와 와인이 너무 좋았었다며 칭찬을 해 주신 게 채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후문을 듣고선 ‘사람 일이라는 게 참…’이라는 감사한 마음과 함께 만감이 교차하기도 했습니다.
이건 공식적인 멘트고 실상은 : 그동안 고생했으니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좋았겠으나,,, 그건 동화 속에나 나오는 이야기고, 이제 백수인데 생계와 대출금 상환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데 이게 그중에 가장 최선의 결정이었기에 ‘감사합니다’하고 넙죽 일을 시작했습니다.

미슐랭을 어떻게 운영하는지 현장에서 일하며 눈으로 보고, 단언컨대 (군대)훈련소보다 혹독한 노동 강도를 온몸으로 경험했습니다. 좋은 동료와 인연을 만나고 감사한 일이 많았음에도 이러다간 몸이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망가질 것 같아서 약 반년 뒤 이직했습니다.
이 기간이 유의미했던 결정적인 이유를 꼽자면, 이 짧은(?) 기간 동안 10년 넘게 시달렸던 불면증이 싹 다 해결되었습니다. 눈만 감으면 잘 수 있었어요. 눈을 감았다가 뜨면 출근.
이후에도 동일한 업종에서 여러모로 감사하고 더 나아 보이는 제안들이 있었습니다만 한동안은…
이 모든 것들을 하면서도 동시에 푹 빠진 게 있습니다.
와인, 그리고 이와 관련한 DB를 다루는 것에 AI를 활용하는 일들입니다. 초창기 부터 현재까지 여러 모델에 걸쳐 업무들과 연계하여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데요,
처음에는 지피티나 제미나이에게 보다 정확한 와인 관련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프롬프트를 만들고 다듬는 일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정보들을 외부 메모리에 누적시키며 결과값을 보완하여 완성도를 올리고, 이를 기반으로 DB누적 시스템을 다시 설계하는 일, 시스템이 누적된 결과물을 스스로 평가하고 수정하며 정리하는 프로세스를 만들고 정비하는 일들을 함께 했습니다.
동시에 이 모든 과정에 사용되는 메모리와 토큰 효율을 개선하고 프롬프트와 캐싱을 압축하는 것. 하네스와 훅, 서브 에이전트와 루프를 설계하는 일. 시중에 나온 LLM들을 비교하고 오케스트레이터와 MCP, API와 CLI를 직결해서 업무 범위를 넓혀갔습니다.
여기까지 오니 할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웹페이지 구조와 SEO, GEO를 분석하고, 실무에 필요한 ERP를 설계하고 운영하는 일. 온디바이스 앱을 개발해 배포하고 원격 업무를 위한 AX 설계까지 매일 진화하는 생태계와 무궁무진한 세상을 보고 느끼고 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과정 뒷단에 있는 우려사항 – 만든 사람이 그 코드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를 때 일어나는 사고 – 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 시간을 두고 배우고 숙달시키며 좋은 인연들을 만나 가르침 받고 언젠가 날개가 달린 듯 활용할 때가 있겠지요.

무덤덤하게 써 내려갔지만 사실 이 문장들 사이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장면들이 숨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차라리 내일이 오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몸과 마음이 아파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 같은 것이지요. 끝없는 무기력함과 자책감, 앞길이 보이지 않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발 앞에 뿌려진 별사탕 몇 개와 같은 – 그렇지만 너무 소중한 – 순간들 말입니다.
투잡, 쓰리잡을 소화하면서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쓰러져 잠든 여러 밤들, 세상이 나를 억까하는 것 같은 시간들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지금까지 이것들을 공유하는 걸 왜 그리 망설였나 싶네요. 혹시나 비슷한 시기를 보내고 계신 분이 있다면 이 글이 아주 작은 위로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 홈페이지는 이 모든 시간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기존에는 네이버 플레이스 유입을 위해 네이버 블로그를 위주로 글을 발행해 왔다면, 앞으로는 이곳에 와인 리뷰, 관련한 여러 인사이트, 루바토를 시작한 이유와 과정, 미슐랭에서 보고 배운 것들, 앞으로 하고 싶은 사업의 방향까지 와인과 레온에 대한 아카이브로서 다양한 기록을 남길 예정입니다.
이 웹사이트는 현재 ‘멋지게 보이는 것’보다 ‘기록을 목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후에는 각종 정보와 인사이트들을 모은 허브로써, 더 나아가 뉴스레터 형식의 정기 발행도 염두하고 있습니다.
아, 최근에는 몇몇 새로운 도전들과 설레는 소식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수년간 쉬고 있던 운동을 규칙적으로 한다는 것. 앞으로 마주할 멋진 일들에 몸과 마음을 마음껏 불태우기 위해 그동안 보살피지 못했던 것들을 정비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숨 막히는 여름이 지나면, 서늘한 가을과 풍성한 결실을 맞이한 뒤, 겨울이 오고 다시 봄이오겠지요.
소식 자주 남기겠습니다.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